[터무늬있는이야기2] 나의 청년주거 분투기

서울시50플러스재단과 함께하는 ‘터무늬있는 이야기’

서울시 50플러스재단과 사회투자지원재단이 함께 ‘터무늬있는 이야기’를 11월, 12월 두 달간 5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50플러스 세대와 함께 협력하고, 청년 주거안정 및 지역공동체 활동을 지원하는 ‘터무늬있는집’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2020년 10월 두 기관은 홍보 협력을 맺었습니다. 

 

시민출자 청년공유주택 터무늬있는집

터무늬있는집은 도시 청년들의 열악한 주거실태와 과다한 주거비 부담 등, 터무니없는 청년들의 주거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이를 빗대어 만든 세대 협력형 청년주택으로, 시민이 자발적으로 출자해 설립한 기금을 바탕으로 전세보증금을 조성하고 입주 청년들은 별도의 보증금 없이 저렴한 월 사용료를 내고 거주하는 청년주택입니다. 기존 임대주택·사회주택과 달리 입주자로 개인이 아닌 청년 단체를 선정하고, 청년들이 지역사회에서 창업, 공동체간 교류 등의 지역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사회투자지원재단

공익을 위한 시민들의 참여경제를 통해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대안적인 경제활동을 지원합니다.

 

[터무늬있는이야기2] 나의 청년주거 분투기

 

터무늬있는집 시민출자자께 전하는 작은 마음의 액자

 

두 번째 이야기는 50+출자자 정은수님의 청년주거 분투기와 터무늬있는집 참여 후기입니다. 50+세대라면 공감할 만한 출자자님의 집과 이웃,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때 그 시절을 지나 어느덧 2020년 청년들의 집에 성큼 와있게 됩니다. “꿈꾸지 않고 상상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힘든 마음을 내려놓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집을 꿈꾸며 청년주택 출자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정은수 시민출자자님의 말처럼 세대가 협력해 함께 꿈꾸고 집을 만드는 일,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터무늬있는집 정은수 출자자님의 나의 청년주거 분투기

 

50+ 터무늬있는집 김수동·정은수 부부출자자

 

1990년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지금이야 ‘지방대’라고 한꺼번에 부르지만 예전엔 그래도 이름 있던 국립대학교의 상과대학에 다니고 있었지만 남자 동기들이 손가락 사이마다 끼워도 끼울 곳이 부족하다던 입사원서나 추천서는 한 장 도 받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여자들의 취업률이 낮던 때였다.

‘그래 서울로 가자. 사람은 나서 서울로 가야한다고 했어.’
우여곡절 끝에 취업연계를 해준다는 교육기관에 들어갔다 문제는 그 기관이 서울에 있었다는 것.

 

당시 필동에 사시던 큰아버지 댁에는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위인 사촌언니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루에 4시간 수업이 있었기에 아침 일찍 나올 필요가 없었지만 이런 저런 스터디를 만들어서 일찍 집을 나왔다. 사촌언니는 그때 대학원 졸업논문을 쓰고 있었고 갑자기 한 방에서 지내게 된 사촌동생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네며 다가 왔지만 취직을 하고 싶어 집도 떠나고 학교 수업을 빠지며 취업연계 과정을 듣고 있던 때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달 후 우여곡절 끝에 일용직 일자리를 구했다. 그리고 맨 처음 한 일은 방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의 ‘ㄱ’자 집 방 한 칸을 얻었다.

 

보증금 2백만 원에 월세가 12만원이었다. 급여가 40만원이 채 안 되었으니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때 나이가 스물두 살.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 서울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온 터라 모든 것이 두려웠지만 사촌언니와 살던 어색한 큰아버지 댁을 얼른 나오고 싶어 쉽게 결정했다.

 

부엌은 따로 없었고 툇마루가 있어 그 앞에 간이 칸막이를 하여 브루스타를 두고 살았다. 세수는 마당 가운데 있는 공동 수도에서 했다 추운 겨울 엎드려 머리를 감고 일어서면 드러난 등허리는 감각이 없어진 채 한참을 얼얼했다.

 

화장실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내 방 바로 앞에 있어서 항상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느낌의 냄새를 맡아야 했다. 이사를 가고 나서야 알았는데 그 방은 난방이 되지 않았다. 이사를 간 때가 2월이라 전기장판이 없이는 잠이 들 수 없었다.

 

옆방에는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었고 구두 디자이너인 그 아버지는 매일 밤 술에 취해 들어왔고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매일 밤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의 끝도 없는 싸움은 밤마다 계속되었으며 난 그 소리를 고스란히 매일 밤 들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멀리 있으면 소리가 덜 들릴까 하여 반대쪽 벽면의 작은 창 아래에 누우면 지나가다가 내 방 창문아래서 노상방뇨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냄새가 지나가던 사람의 요의를 건드리는 걸까 왜 하필 내 방 창문 아래일까를 늘 생각했다.

 

지금에야 이런 기억을 떠올리면 그런 곳에서 어떻게 지냈나 싶지만, 그때 난 그저 좋기만 했다. 일용직이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면접기회가 주어진다 했었고 내겐 방세를 낼 돈이 있었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만 잠들 수 있는 방이 있었기에 매일 밤 내 인생의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그 방을 거쳐 간 친구들도 많았다. 그 당시 지방에서 여자가 서울에 혼자 올라와 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대학 때 친구들 여럿이 내 방을 거쳐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서 나갔다. 그들에게도 내 방은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 되었음을 지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서울에 오게 된 친구를 만났다. 나보단 형편이 넉넉한 친구라 서울에 집을 구하고 있는데 혼자 살긴 무섭고 돈도 부족하니 같이 살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돈이 별로 없었던 나는 작은 방은 쓰기로 하고 투룸 빌라로 이사를 했다.

 

참 꿈같던 날들이었다. 재래식 화장실을 벗어났고 난방이 되었고 부엌도 있었고 수도에서 뜨거운 물이 나왔다. 2층이라서 행인들이 내는 소음도 없었다. 원시형 쉐어하우스라고 하면 되려나 각자의 방을 투자한 돈에 맞게 사용하면서 다른 공간을 공유하는 딱 그거 쉐어하우스. 자고로 달콤한 꿈은 길지 않다. 친구가 먼저 결혼을 하는 바람에 다시 방을 구해야 했다.

 

이제는 그 예전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남자친구와 집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현실은 좌절 그 자체였다. 당시는 1인 가구가 사실상 별로 없었다. 지금 같은 원룸, 스튜디오타입의 방은 거의 없었고 작은 집 전세를 알아보았는데 가격이 그야말로 후덜덜 했다. 천사백만원 정도 했던 것 같다. 방이 하나이거나 두 개이거나는 별로 가격에 영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32평 아파트에 문간방을 얻어 세를 들었다.
그것도 당시 같이 일하던 동료의 언니가 아파트를 분양 받았는데 입주금이 부족하여 방 한 칸을 세를 놓으려고 좀 아는 사람을 찾고 있다하여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그 부부에게는 5세 된 아들 2세 된 딸이 있었고 나이는 30대 초중반이었다. 사실 아파트는 한 가족이 아닌 사람이 살기에 적절한 공간이 아니다.

 

그 집에서는 참 공부를 열심히 했다. 직장에 나가기 전에 강남에 있던 일본어 학원엘 갔다. 새벽 6시 반에 시작하는 수업이었다. 집에선 다섯 시 반이면 나가야 해서 좋았다. 퇴근하고도 학원 수업을 들었다. 집에 일찍 들어와도 그 가족들과 편하게 쉴 수는 없었다. 그땐 나만 불편하다 생각했는데 그 부부도 어지간히 힘들었을 것 같다.

 

보증금 내어줄 돈이 없으니 일 년 이상 있어야 한다던 조건을 받아들이고 이사를 간 것이었지만 당초 약속을 깨뜨리고 결혼을 결심했다. 매일 새벽에 나가 교대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려고 기다리며 잠시 의자에 앉았다가 졸아서 지하철을 놓치며 지냈고 주말에는 하루 종일 집을 비우려 도봉산엘 갔다. 산에는 아침 일찍 가서 하루 종일 있다가 돌아올 수 있어 좋았다.

 

게다가 지하철역 이름이 도봉산역이니 바로 옆에 있겠지 싶었다. 서울이 아직도 무서웠던 20대 사회초년생에겐 맘 편히 쉴 곳이 정말 필요했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했고 비로소 아 이런 편안함이 집이구나 싶었다.

 

11월 말 입주를 앞두고 있는 강북구 삼양동의 <터무늬있는 희망아지트> 사진출처 : 이앤건축사사무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집

 

일찍 나가지 않아도 되는 집, 늦게까지 밖에서 버티다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집, 주말에도 있을 수 있는 집. 물론 그 집엔 내가 앞으로 갚아야 할 대출 통장이 붙어 있었지만, 부모님 슬하를 떠나 서울에 온 후 임시로 살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을 일시에 잠재운 집. 그 작은 집에서의 첫날이 아직도 내게 생생한 이유다. 지금 청년 시절을 다시 돌아보니 내겐 이렇게 저렇게 손 벌려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불편한 동거를 몇 달간 하면서도 살갑게 대해 준 사촌언니.
친구와의 동거를 위해 급히 보증금을 달라며 집주인이면 다 돈을 쌓아놓고 사는 줄 알았던 어린 나에게 그 돈을 급히 마련해준 월세집 주인 아주머니.
알고 보니 돈이 부족하지도 않았는데 친구 생각해서 같이 지내자며 손 내밀어 준 친구.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동료가 안타까워 언니 집에 끼워 넣어준 직장 동료.

 

그들 덕분에 촌뜨기 20대의 나는 현실의 냄새나고 차가운 방, 노상 방뇨를 하는 소리마저 잊고 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제 청년이 된 딸을 보며 그 시절 생각을 해본다.

 

그 시절엔 다들 부모님보다는 더 잘 살아낼 자신이 있었다. 이런저런 상황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미래에 대해 두려움은 없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보다는 더 좋은 직장을 구하고 싶은 욕망이 있던 때였다. 직장을 구하고 작은 셋방이라도 구하면 결혼을 하고 고생하다 보면 내 부모님보다는 넉넉하게 살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의 청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단연코 내 청년 시절보다 가혹하다.
넘쳐나는 스펙과 고학력에도 여전히 굳게 닫힌 취업시장. 끝없이 오르는 집값. 주위를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 청년들은 미래에 대해 기대나 계획보다 자신을 간수하고 살아 낼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 지인은 아들에게 들은 말을 깊은 한숨과 함께 전해주었다.
‘엄마, 나는 나중에 우리 집처럼 냉동실에 고기를 채워 넣고 꺼내 먹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꿈꾸지 않고 상상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미래를 꿈꾸며 계획하는 것만이 어려운 현실을 이겨낼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어려운 현실에서 고군분투 하며 힘들었던 몸을 누이고 편히 쉴 작은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힘든 마음을 내려놓고 미래를 꿈꾼단 말인가.

 

나는 치열하게 살았으나 불행히도 그리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했고 청년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다행히도 먼저 깨인 선배들이 근사한 일을 계획했으니 터무늬있는집, 시민출자 청년공유주택이다. 특별할 것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마음을 모아 청년 단체에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일. 멋지지 않은가.

 

어려웠던 시절,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미래세대를 위해 책을 쓰고 장학재단을 만들겠다는 꿈은 비록 꿈으로 끝났지만, 의식 있는 선배 시민들 덕분에 터무늬있는집을 알게 되고 출자를 하여 청년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공간에 벽돌 한 장 보탤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반백 년 살면서 별로 내세울 일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50+ 여러분에게 감히 권한다.
터무늬있는집에 출자하여 대한민국의 미래, 청년 세대의 꿈에 기여하고 행복해하며 사시라.

 

터무늬있는 출자자들이 함께한 자리 <터무늬있는집 출자자모임>

 

 

글 l  터무늬있는집 50+ 시민출자자 정은수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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