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살롱'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활동을 하는 단체인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수행과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라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증은 호기심으로 바꼈습니다. 처음 봉천살롱을 방문했던 날이 기억납니다. 봉천살롱 멤버이자 비건(vegan)인 미진 님이 비건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는데, 너무 맛있었어서 아직도 봉천살롱을 생각하면 그 때 먹은 비건케이크가 떠오릅니다. 봉천살롱은 다재다능하고, 또 환대 넘치는 멤버들이 많아 방문할 때마다 즐거운 대화가 1-2시간씩 이어지곤 했습니다. 4년의 터무늬 살이를 마치고 또 각자의 길로 나아가는 봉천살롱 멤버들이 언제나 그리울 것 같습니다. 아라 님과 미진 님이 이주한 문경에서 꼭 한 번 다같이 놀러가자고 한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
터무늬있는집 6호(봉천살롱) 입주자들의 즐거웠던 일상
터무늬있는집(터무늬) : 터무늬있는집에 처음 들어왔던 순간을 떠올려볼까요?
조아라(아라) : 명상 아카데미인 행복수업협동조합에서 10명의 청년을 모아 100일 동안 수행을 위한 공동생활을 하는 프로그램인 ‘100일 동행’을 진행했었어요. 저도 참여자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100일 동행에 참여하면서 서울에서는 공동체로 사는 게 더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명철 님으로부터 터무늬있는집이라는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렇게 터무늬있는집에 함께 살게 됐어요.
사전에 질문지를 받고 이 질문을 '처음 집에 들어갔던 순간을 떠올려보라'는 걸로 잘못 이해했어요😅 처음 집에 방문했을 때 마음이 복잡했거든요. 저희가 6명이 함께 살기로 했는데, 집 상태는 좋은데 크기가 너무 작은 거에요. 6명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정화(정화) : 저는 100일 동행 당시에 행복수업협동조합 실무자로 일하고 있었고, 100일 동행에는 수행 도우미 역할로 참여했었어요. 혼자 살아왔던 참여자들이 100일 동행을 통해 함께 살면서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걸 보고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저도 집이 사무실에서 너무 멀어 근처로 이사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때여서 동참하는 쪽으로 마음을 모으게 됐어요. 제가 함께 살기로 결정하는 데 터무늬있는집이 큰 역할을 했어요. 집이라는 게 마음만으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서울 한복판에서 적은 비용으로 함께 살 수 있는 터무늬있는집이 없었다면 꿈만으로 끝났을 거 같아요.
터무늬 : 100일 동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이었나요?
아라 : 집중 수련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같이 살면서 명상을 하고, 또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요가, 연극 등을 배우기도 했어요. 일종의 수련을 위한 특급 케어를 받은 건데, 그때 요가를 가르쳐주러 왔던 선생님이 함께 살았던 하정 님이에요. 명철 님은 100일 동행 참여자는 아니었는데, 겨울에 일주일씩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그 계기로 터무늬있는집 입주까지 이어지게 되었고요.
정화 : 100일 동행을 할 때는 규율도 있고, 안내해 주는 선생님도 있어서 함께 사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어느 정도 해결됐는데, 그런 거 없이 우리끼리도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어요. 갈등 가운데 각자가 그 어려움을 직면하면서 명상의 힘으로 잘 풀어나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아라 : 저도 그런 부분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같이 수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니까 갈등이 생겼을 때 그 힘으로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어요. 혼자 있으면 수행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같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터무늬 : 명철 님이 같이 살게 된 배경은 또 다른데, 그 이야기도 부탁드려요.
김명철(명철) : 저는 당시 관악에서 활동한 지 3~4년 정도 된 시점이었어요. 터무늬있는집에 대해서는 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관악에 터무늬있는집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터무늬있는집의 지향점과 방향성이 관악의 청년 활동가들과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다고요. 그래서 처음에 관악에서 함께 활동하던 청년들에게 공동주거 제안을 했는데 각자 처해있는 사정이 달라 실현되지는 못했어요.
이전에 다른 단체에서 운영하는 셰어하우스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요. 그 당시 느꼈던 게 활동가들이 모여 살더라도 동일한 신념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공동체가 아니라 경제적인 목적밖에 안 남는다는 거였어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같은 가치관이나 방향성을 갖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행복수업에서 명상 코스를 하게 됐는데 방향성이 저하고도 맞고, 그래서 여기에서 경험한 수행을 앞으로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 100일 동행을 함께 했던 분들이 같이 모여 살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고, 이런 분들과 수행을 하면서 함께 살면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역 활동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부분도 비슷했고요. 수행에 대한 방향성 플러스 지역 활동가로서의 활동성이 함께 있는 공동체를 꿈꿨었어요.

봉천살롱과 함께 진행했던 '너와 나, 몸과 마음으로 만나기' 프로그램
터무늬 :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하나씩 꼽아볼까요?
아라 : 저는 첫해에 생일 파티를 다 돌아가면서 한 번씩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생일 케이크도 미진 님이 직접 만들어주고, 서프라이즈하게 생일상도 차리고, 물론 가끔 대놓고 할 때도 있었지만요😁 제 생일에도 많은 분들이 와 주셨는데, 어렸을 때 이후로 그런 생일 파티를 해본 게 처음이었어요.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는데, 이런 생일 파티는 앞으로 더 이상 안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정화 : 여러 장면이 떠오르네요. 처음에 오픈하우스 했던 것도 기억에 남고, 지역의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치유 프로그램을 했던 것도 기억에 남고, 크리스마스에 파티를 하면서 내년 계획을 적는 시간을 가졌던 것도 기억에 남고, 지역에서 동아리 지원사업에 뽑혀 1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맛있는 음식을 사 먹었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강감찬 공원에서 텃밭을 분양받아서 농사를 지었던 것도 기억나요.
아라 : 저희가 그때 농사지었던 배추로 김장도 해먹었잖아요😀
명철 : 저는 제 방에 처음 누웠을 때의 느낌이 생각나요. 터무늬있는집은 제가 지금까지 살았던 집 중에서 주거 환경이 가장 좋은 집이었거든요. 단독주택 2개 층을 단독으로 쓰는 집에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터무늬제작소에서 생활에 필요한 집기를 살 수 있도록 예산까지 지원해 주셔서 부족한 것 없이 생활할 수 있었어요. 처음 잠자리에 들기 위해 누웠을 때 느꼈던 그 안온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이 많았던 4년이에요.
터무늬 :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아라 : 저 자신을 보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터무늬있는집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많이 배웠고, 특히 사람답게 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연습할 수 있었거든요. 어렸을 때 배운 걸 잊고 살다가, 누군가를 통해 저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그걸 다시 배우는 과정이었어요.
정화 : 저는 인내가 필요한 일이고, 수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 원가족과 함께 살 때 느꼈던 감정이 여기서 계속 투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그때 해결하지 못한 마음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만나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또 다른 가족을 이뤄가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원가족과의 관계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이슈들을 다시 경험하고, 자각하고, 배우고…
터무늬있는집에서 살았던 4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대학원도 진학했고, 제가 일하는 행복수업협동조합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면서 힘든 일도 많았거든요.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 같아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한 시간이었습니다.
명철 :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에고(ego)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면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또 그 불편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다들 내 마음 같지 않구나!”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많았어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고 반응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들이 빗나가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터무늬 : 정화 님이랑 명철 님은 터무늬있는집에서 나와 혼자 살게 됐는데, 어떠세요?
명철 : 만족스럽습니다. 저는 ENFP, 그러니까 매우 외향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다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제가 보기보다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많이 알게 됐어요. 그래서 당분간은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싶어요. 혼자 지내면서 산책도 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도 충분히 가지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화 : 저는 행복수업협동조합이 있는 센터로 들어왔는데, 여기가 저 혼자만의 공간은 아니라 고민을 했었어요. 4년을 누군가와 함께 살았으니, 이번에는 따로 방을 얻어서 오롯이 혼자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혼자 있을 생각, 또 나만의 공간을 꾸밀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하더라고요😛
한참 혼자 살 계획을 세우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고, 또 행복수업협동조합 차원에서 공간에 대한 고민도 있고 해서 센터로 들어오게 됐어요. 센터의 공간을 내 집처럼 여기면서 지내면 애정도 쌓이고, 또 이 안에 에너지가 모여서 사람들이 더 많이 드나들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형태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걸 선택한 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지내봐야 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출퇴근 시간이 1분으로 줄어서 너무 좋습니다^^
터무늬 : 아라 님은 미진 님이랑 계속 같이 사는 거죠?
아라 : 저는 제가 살아본 적 없는 지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었거든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경북 상주에서 나물 캐는 알바를 하게 된 거예요. 상주에서 지내보니까 서울이랑 왔다 갔다 하기도 편하고, 시골만의 매력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벼룩시장으로 집을 알아보다 상주 옆에 있는 문경에 괜찮은 집이 있어서 문경으로 내려오게 됐어요.
상주랑 문경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차피 서울에 처음 올라올 때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똑같아요. 다행히 제가 문경에 내려간다고 하니까 미진 언니도 같이 내려가겠다고 해서 문경에서 계속 같이 살게 됐어요.

2022년 9월에 있었던 재계약 심사(성과공유회) 모습
터무늬 : 시민의 연대로 만든 집, 터무늬있는집이 여러분의 삶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정화 : 저는 운영위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운영위원으로서 기여보다는 오히려 받은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동시에 터무늬있는집 활동에 대해 고민도 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터무늬있는집과 함께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덕분에 청년들과 하는 모임뿐만 아니라 출자자 모임도 편하게 갈 수 있었고요.
다른 운영위원분들이 모두 우리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이잖아요. 특히 청년들을 지지하고, 하나하나 걱정하면서 마음 써주시는 모습을 볼 때 진짜 어른의 모습이란 게 이런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터무늬있는집에 사는 청년으로서 감사하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이런 분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어서 감사하기도 했어요.
아라 : 저희 집 올라가는 계단 옆에 보면 “터무늬있는집 6호” 팻말과 함께 출자자분들 성함이 쓰여 있어요. 계단을 올라갈때 힘들어서 천천히 걸으면서 그걸 항상 봤거든요. 매일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우울증이 드러났거든요. 100일 동행 끝난 뒤에 회사도 그만두면서 점점 우울해지기 시작했고, 터무늬있는집에 사는 기간 동안 대부분을 우울하게 보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함께 살았던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마음 놓고 우울해할 수 있었어요. 저는 오히려 그게 너무 감사해요. 몸도 마음도 너무 무거워서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한 것 같아 같이 살았던 분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제가 그 시기에 터무늬있는집에 살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음 놓고 우울해할 수 없었다면 저는 아마 그 시기를 잘 버텨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터무늬 : 효율과 경쟁, 성공만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터무늬있는집에 누군가에서 마음껏 우울해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니 뿌듯하네요.
명철 : 저는 부채감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자원과 기회를 받는 게 쉬운 게 아니고, 또 그게 누구나 쉽게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닌 거를 알기 때문에 저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채감이 생긴 것 같아요. 터무늬있는집에 사는 동안 그런 부채감을 갚기 위해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요.

모두들청년주거협동조합 주관으로 진행한 옥상플리마켓에 참여한 봉천살롱 멤버들
터무늬 :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정의하는 터무늬있는집은 무엇인가요? 터무늬있는집은 OOO이다!
아라 : 저에게 터무늬있는집은 안전하게 쉬면서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터무늬있는집은 “은둔처”였습니다.
정화 : 저에게 터무늬있는집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고, 여러 이야기를 듣고, 같이 교류도 하고, 또 그냥 지나가기도 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정거장”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명철 : 저는 “품”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어요. 엄마의 품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사회적인 부모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품을 내어주는 선배 시민들이 신자유주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터무늬 : 은둔처이자, 정거장이자, 품이었던 터무늬있는집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모습의 삶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터무늬 살이는 끝났지만, 터무늬있는집의 멤버로서 앞으로도 계속 터무늬있는집을 응원해주시기를 부탁드려요👍
정리_성승현 선임연구원(터무늬제작소)
터무늬있는집 6호(봉천살롱) 입주자들의 즐거웠던 일상
터무늬있는집(터무늬) : 터무늬있는집에 처음 들어왔던 순간을 떠올려볼까요?
조아라(아라) : 명상 아카데미인 행복수업협동조합에서 10명의 청년을 모아 100일 동안 수행을 위한 공동생활을 하는 프로그램인 ‘100일 동행’을 진행했었어요. 저도 참여자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100일 동행에 참여하면서 서울에서는 공동체로 사는 게 더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명철 님으로부터 터무늬있는집이라는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렇게 터무늬있는집에 함께 살게 됐어요.
사전에 질문지를 받고 이 질문을 '처음 집에 들어갔던 순간을 떠올려보라'는 걸로 잘못 이해했어요😅 처음 집에 방문했을 때 마음이 복잡했거든요. 저희가 6명이 함께 살기로 했는데, 집 상태는 좋은데 크기가 너무 작은 거에요. 6명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정화(정화) : 저는 100일 동행 당시에 행복수업협동조합 실무자로 일하고 있었고, 100일 동행에는 수행 도우미 역할로 참여했었어요. 혼자 살아왔던 참여자들이 100일 동행을 통해 함께 살면서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걸 보고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저도 집이 사무실에서 너무 멀어 근처로 이사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때여서 동참하는 쪽으로 마음을 모으게 됐어요. 제가 함께 살기로 결정하는 데 터무늬있는집이 큰 역할을 했어요. 집이라는 게 마음만으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서울 한복판에서 적은 비용으로 함께 살 수 있는 터무늬있는집이 없었다면 꿈만으로 끝났을 거 같아요.
터무늬 : 100일 동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이었나요?
아라 : 집중 수련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같이 살면서 명상을 하고, 또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요가, 연극 등을 배우기도 했어요. 일종의 수련을 위한 특급 케어를 받은 건데, 그때 요가를 가르쳐주러 왔던 선생님이 함께 살았던 하정 님이에요. 명철 님은 100일 동행 참여자는 아니었는데, 겨울에 일주일씩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그 계기로 터무늬있는집 입주까지 이어지게 되었고요.
정화 : 100일 동행을 할 때는 규율도 있고, 안내해 주는 선생님도 있어서 함께 사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어느 정도 해결됐는데, 그런 거 없이 우리끼리도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어요. 갈등 가운데 각자가 그 어려움을 직면하면서 명상의 힘으로 잘 풀어나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거든요.
아라 : 저도 그런 부분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같이 수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니까 갈등이 생겼을 때 그 힘으로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어요. 혼자 있으면 수행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같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터무늬 : 명철 님이 같이 살게 된 배경은 또 다른데, 그 이야기도 부탁드려요.
김명철(명철) : 저는 당시 관악에서 활동한 지 3~4년 정도 된 시점이었어요. 터무늬있는집에 대해서는 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관악에 터무늬있는집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터무늬있는집의 지향점과 방향성이 관악의 청년 활동가들과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다고요. 그래서 처음에 관악에서 함께 활동하던 청년들에게 공동주거 제안을 했는데 각자 처해있는 사정이 달라 실현되지는 못했어요.
이전에 다른 단체에서 운영하는 셰어하우스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요. 그 당시 느꼈던 게 활동가들이 모여 살더라도 동일한 신념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공동체가 아니라 경제적인 목적밖에 안 남는다는 거였어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같은 가치관이나 방향성을 갖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행복수업에서 명상 코스를 하게 됐는데 방향성이 저하고도 맞고, 그래서 여기에서 경험한 수행을 앞으로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 100일 동행을 함께 했던 분들이 같이 모여 살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고, 이런 분들과 수행을 하면서 함께 살면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역 활동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부분도 비슷했고요. 수행에 대한 방향성 플러스 지역 활동가로서의 활동성이 함께 있는 공동체를 꿈꿨었어요.
봉천살롱과 함께 진행했던 '너와 나, 몸과 마음으로 만나기' 프로그램
터무늬 :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하나씩 꼽아볼까요?
아라 : 저는 첫해에 생일 파티를 다 돌아가면서 한 번씩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생일 케이크도 미진 님이 직접 만들어주고, 서프라이즈하게 생일상도 차리고, 물론 가끔 대놓고 할 때도 있었지만요😁 제 생일에도 많은 분들이 와 주셨는데, 어렸을 때 이후로 그런 생일 파티를 해본 게 처음이었어요.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는데, 이런 생일 파티는 앞으로 더 이상 안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정화 : 여러 장면이 떠오르네요. 처음에 오픈하우스 했던 것도 기억에 남고, 지역의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치유 프로그램을 했던 것도 기억에 남고, 크리스마스에 파티를 하면서 내년 계획을 적는 시간을 가졌던 것도 기억에 남고, 지역에서 동아리 지원사업에 뽑혀 1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맛있는 음식을 사 먹었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강감찬 공원에서 텃밭을 분양받아서 농사를 지었던 것도 기억나요.
아라 : 저희가 그때 농사지었던 배추로 김장도 해먹었잖아요😀
명철 : 저는 제 방에 처음 누웠을 때의 느낌이 생각나요. 터무늬있는집은 제가 지금까지 살았던 집 중에서 주거 환경이 가장 좋은 집이었거든요. 단독주택 2개 층을 단독으로 쓰는 집에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터무늬제작소에서 생활에 필요한 집기를 살 수 있도록 예산까지 지원해 주셔서 부족한 것 없이 생활할 수 있었어요. 처음 잠자리에 들기 위해 누웠을 때 느꼈던 그 안온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이 많았던 4년이에요.
터무늬 :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아라 : 저 자신을 보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터무늬있는집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많이 배웠고, 특히 사람답게 사는 법을 다시 배우고 연습할 수 있었거든요. 어렸을 때 배운 걸 잊고 살다가, 누군가를 통해 저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그걸 다시 배우는 과정이었어요.
정화 : 저는 인내가 필요한 일이고, 수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 원가족과 함께 살 때 느꼈던 감정이 여기서 계속 투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그때 해결하지 못한 마음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만나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또 다른 가족을 이뤄가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원가족과의 관계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이슈들을 다시 경험하고, 자각하고, 배우고…
터무늬있는집에서 살았던 4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대학원도 진학했고, 제가 일하는 행복수업협동조합에서도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면서 힘든 일도 많았거든요.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 같아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한 시간이었습니다.
명철 :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에고(ego)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면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또 그 불편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다들 내 마음 같지 않구나!”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많았어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고 반응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들이 빗나가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터무늬 : 정화 님이랑 명철 님은 터무늬있는집에서 나와 혼자 살게 됐는데, 어떠세요?
명철 : 만족스럽습니다. 저는 ENFP, 그러니까 매우 외향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다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제가 보기보다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많이 알게 됐어요. 그래서 당분간은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싶어요. 혼자 지내면서 산책도 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도 충분히 가지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화 : 저는 행복수업협동조합이 있는 센터로 들어왔는데, 여기가 저 혼자만의 공간은 아니라 고민을 했었어요. 4년을 누군가와 함께 살았으니, 이번에는 따로 방을 얻어서 오롯이 혼자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혼자 있을 생각, 또 나만의 공간을 꾸밀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하더라고요😛
한참 혼자 살 계획을 세우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고, 또 행복수업협동조합 차원에서 공간에 대한 고민도 있고 해서 센터로 들어오게 됐어요. 센터의 공간을 내 집처럼 여기면서 지내면 애정도 쌓이고, 또 이 안에 에너지가 모여서 사람들이 더 많이 드나들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형태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걸 선택한 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지내봐야 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출퇴근 시간이 1분으로 줄어서 너무 좋습니다^^
터무늬 : 아라 님은 미진 님이랑 계속 같이 사는 거죠?
아라 : 저는 제가 살아본 적 없는 지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었거든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경북 상주에서 나물 캐는 알바를 하게 된 거예요. 상주에서 지내보니까 서울이랑 왔다 갔다 하기도 편하고, 시골만의 매력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벼룩시장으로 집을 알아보다 상주 옆에 있는 문경에 괜찮은 집이 있어서 문경으로 내려오게 됐어요.
상주랑 문경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차피 서울에 처음 올라올 때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똑같아요. 다행히 제가 문경에 내려간다고 하니까 미진 언니도 같이 내려가겠다고 해서 문경에서 계속 같이 살게 됐어요.
2022년 9월에 있었던 재계약 심사(성과공유회) 모습
터무늬 : 시민의 연대로 만든 집, 터무늬있는집이 여러분의 삶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정화 : 저는 운영위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운영위원으로서 기여보다는 오히려 받은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동시에 터무늬있는집 활동에 대해 고민도 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터무늬있는집과 함께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덕분에 청년들과 하는 모임뿐만 아니라 출자자 모임도 편하게 갈 수 있었고요.
다른 운영위원분들이 모두 우리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이잖아요. 특히 청년들을 지지하고, 하나하나 걱정하면서 마음 써주시는 모습을 볼 때 진짜 어른의 모습이란 게 이런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터무늬있는집에 사는 청년으로서 감사하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이런 분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어서 감사하기도 했어요.
아라 : 저희 집 올라가는 계단 옆에 보면 “터무늬있는집 6호” 팻말과 함께 출자자분들 성함이 쓰여 있어요. 계단을 올라갈때 힘들어서 천천히 걸으면서 그걸 항상 봤거든요. 매일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터무늬있는집에 살면서 우울증이 드러났거든요. 100일 동행 끝난 뒤에 회사도 그만두면서 점점 우울해지기 시작했고, 터무늬있는집에 사는 기간 동안 대부분을 우울하게 보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함께 살았던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마음 놓고 우울해할 수 있었어요. 저는 오히려 그게 너무 감사해요. 몸도 마음도 너무 무거워서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한 것 같아 같이 살았던 분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제가 그 시기에 터무늬있는집에 살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음 놓고 우울해할 수 없었다면 저는 아마 그 시기를 잘 버텨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터무늬 : 효율과 경쟁, 성공만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터무늬있는집에 누군가에서 마음껏 우울해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니 뿌듯하네요.
명철 : 저는 부채감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자원과 기회를 받는 게 쉬운 게 아니고, 또 그게 누구나 쉽게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닌 거를 알기 때문에 저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채감이 생긴 것 같아요. 터무늬있는집에 사는 동안 그런 부채감을 갚기 위해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요.
모두들청년주거협동조합 주관으로 진행한 옥상플리마켓에 참여한 봉천살롱 멤버들
터무늬 :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정의하는 터무늬있는집은 무엇인가요? 터무늬있는집은 OOO이다!
아라 : 저에게 터무늬있는집은 안전하게 쉬면서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터무늬있는집은 “은둔처”였습니다.
정화 : 저에게 터무늬있는집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고, 여러 이야기를 듣고, 같이 교류도 하고, 또 그냥 지나가기도 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정거장”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명철 : 저는 “품”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어요. 엄마의 품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사회적인 부모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품을 내어주는 선배 시민들이 신자유주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터무늬 : 은둔처이자, 정거장이자, 품이었던 터무늬있는집에서의 시간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모습의 삶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터무늬 살이는 끝났지만, 터무늬있는집의 멤버로서 앞으로도 계속 터무늬있는집을 응원해주시기를 부탁드려요👍
정리_성승현 선임연구원(터무늬제작소)